첫 글
설명서 좋아하는 사람
나는 설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거의 모든 공산품과 서비스에 대해, 설계 의도와 기능 그리고 브랜딩 텍스트를 살펴보기 전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첫 차를 사고서, 일단 차는 모셔두고 설명서를 1페이지부터 정독하는 모습을 친구들이 신기해했던 게 기억난다. 식당에서 식사가 나오기 전까지 '메밀의 효능' 같은 걸 읽는 게 나다.
그것은 내가 제품을 향유하는 방법이다. 좋은 설명서를 보면 제품을 사용하기 전부터 이미 기분이 좋다. 그만큼 나는 제품 설명을 사용자 경험의 중요한 일부로 생각하고 있다. 다양한 설명을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취향도 생겼는데, 요즘은 '사용자 임파워먼트(empowerment)'에 충실한 설명을 좋아한다. 이것에 대해서는 따로 쓰겠다.
소통하는 개발자
이러한 관심과 성향은 내가 개발자로 일을 시작하고 난 이후에도 이어졌다. 지난 10년 동안 나는 개발에 참여하는 제품과 관련한 다양한 종류의 설명을 직접 해볼 기회를 적극적으로 찾아다녔다. 그동안 짧거나 길게 경험해봤던 일들을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 B2B, B2C, 인터널 제품에 대한 사용 가이드, API 레퍼런스 문서 및 릴리즈노트 작성
- SDK 활용 예제 코드 작성 및 데모 어플리케이션 제작
- 제휴사 및 개인 크리에이터 기술지원 세션
- 사내 기술과제 발표를 위한 자료 작성
- 회사 기술블로그, 리서치 아카이브 기고 프로세스 운영
또 나는 팀으로 일을 하는 과정에서 항상 설명의 힘을 믿어왔다. 회사가 헛바퀴 돌지 않으려면, 조직의 역할과 일의 목적을 각자가 이해하고 정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팀의 구성원으로서 나는 설명하는 리더를 지지했다. 또 팀을 맡았을 때는, 내가 설명에 할애하는 시간이 그 설명을 참조하는 팀내외 구성원들의 숫자만큼 배로 시간을 아껴준다는 신념으로 일했다.
예를 들어 나는 팀 내 프로젝트의 Readme를 작성한다든지, API 변경점에 대해 정제된 마이그레이션 가이드를 제공한다든지 하는 일을 가치 있게 여겼다. 또 회의 전에 안건을 사전 공유하고, 회의 후에 회의록을 공유하는 일과 팀의 문서 베이스를 주기적으로 최신화하는 일을 중요시했다.
개발자로서, 무언가 설명하는 일들을 할 때 나는 만족을 느껴왔다. 그 동안 ‘소통 역량’ 항목에서 항상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기에 나는 그것을 개발 조직 안에서 살아갈 나의 무기로 여겼다.
전문성의 확장 - 개발자를 넘어서
개발 조직의 멤버로 나같은 사람 하나쯤 두는 건 나쁘지 않은 구색이었을 거다. 하지만 연차가 쌓이면서, 어느 순간부터 커리어 확장에 대한 욕심이 났다. ‘개발 조직에서의 소통’을 내 특기라 할 수 있다면 그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고 영향력을 넓히고 싶어졌다. 그랬더니 막상 내 커리어 패스에서 개발자로서는 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7년 차 즈음 백엔드 개발자 면접에서 면 접관이 물었다. ‘팀에 합류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요?’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우리가 운영하는 API 문서가 제대로 되어있는지 먼저 파악하고 개선하겠습니다. 또 API에 의미 없는 요청 파라미터나 응답 필드가 있다면 정리하겠습니다.’ 면접관은 고개를 갸우뚱 했다.
이런 순간들을 포함해 종합적으로 판단건대 개발자로서는 ‘소통 역량’이 회사에게도 나에게도 본질적으로 더 좋은 밥을 먹여주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동안 내가 무기로 여겼던 장점이 ‘제가 이래뵈도 사람은 착합니다’를 말하는 수준으로 뭉툭해보이기까지 했다. 내 장점을 살려 전문성을 쌓고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서는, IC 개발자를 넘어 다른 직무로 전직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블로그를 시작하며
전직을 위한 탐색과 시행 착오는 진행 중이며 쉽지 않다.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어쩌면 일하는 동안 계속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도 생각한다. 하루하루를 보내는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기도 하다. 이 블로그를 시작하는 이유에는 이러한 감정들을 조금 달래보고자 하는 것도 있다.
나와 같거나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 나뿐일 리 없기에, 이 블로그를 계기로 커리어에 대한 생각과 정보를 나누고 싶다. 또 어쩌면 이 블로그를 통해, 내가 가진 경험과 역량을 찾는 누군가가 나를 발견해 새로운 기회로 이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