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로서의 기술
기술을 선물로 바라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2019년 일본 야마구치에서 열린 실험적 교육 프로그램 'SFPC Summer 2019 in Yamaguchi'는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됐다. 뉴욕의 실험 학교인 School For Poetic Computation (시적연산학교, SFPC)가 주최한 이 프로그램은 'Technology as a gift (선물로서의 기술)'이라는 주제로 예술과 코드, 하드웨어 그리고 이론이 교차하는 지점을 탐구했다. 평소 SFPC의 활동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나는 지난 2019년 추석 연휴 직전 열흘 동안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자로서 내가 만드는 제품과 기술을 바라보는 관점을 완전히 바꿀 수 있었다.
선물의 의미
어떤 대상을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해 이해하고자 할 때면 우리는 종종 비유를 활용한다. 기술을 선물로서 바라보는 시도는 선물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아마존에서 상품을 주문할 때 마주치는 'This is a gift (선물입니다)' 체크박스는 단순히 영수증 제외나 메시지 카드 추가 같은 기능적 차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더 깊은 '마음 씀'을 상징한다. 우리는 선물을 고르는 순간 거래 그 자체를 넘어 받는 이와의 관계를, 그들의 필요를 더 깊이 생각하게 된다. 시스템이 전면에 내세우는 베스트셀러나 추천 상품을 넘어, 받는 이의 취향과 상황을 고려해 더 세심하게 고른 선택지들 속에서 결정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친구의 이름을 그저 문자열로 바라보다
이러한 관점의 전환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는 프로그램 중 겪은 작은 사건을 통해 깊이 깨닫게 되었다.
프로그램 3일 차, 일본인 참가자 키와코는 프로그램에 참가한 학생과 SFPC 교사, 그리고 YCAM 스텝을 대상으로 하는 '커피챗'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커피챗 참여를 원하는 사람들을 모아 무작위로 1:1 짝을 지어주고, 서로 알아갈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나는 태국인 참가자인 짐과 함께 이 무작위 1:1 매칭 시스템 구현을 자원했다. 짐은 프론트엔드를 맡았고, 나는 백엔드를 맡아 매칭 로직과 매칭 기록을 저장하는 기능을 작성했다. 구현은 하룻밤이면 충분했다. 커피챗 시스템을 제공한 첫날, 커피챗을 신청한 모든 이가 화면에 표시된 짝을 찾아 시간을 보냈다.
사건은 매칭을 운영한 둘째 날 생겼다. 이날 커피챗을 신청한 인원은 홀수였다. 이 경우 우리가 만든 시스템은 마지막에 홀로 남은 사람을 ("홍길동", "")
와 같이 처리하고 있었다. 타카시라는 친구의 이름이 스크린 맨 아래 짝없이 홀로 나타났고, 그는 다소 당황한 눈치였다. 키와코는 재빨리 그를 마지막 그룹에 포함해 3인 커피챗을 만들어줬지만, 나는 깊은 좌절감을 느꼈다. 그때까지 나는 이름 목록을 단순한 텍스트 데이터 배열로만 바라보았을 뿐, 각 이름 뒤에 있는 사람들의 경험과 감정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게 될 그 순간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위한 선물로, 이 시스템을 바라봤더라면...
개발자에게도 선물을
2019년의 이 작은 사건 이후, 나는 개발에 참여하는 제품을 선물로 여기는 마음을 가져왔다. 사실, 제품을 선물로 여기는 관점은 이제 업계에 널리 도입된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 UX) 중심의 제품 설계 및 개발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UX의 맥락은 대개 B2C 서비스의 최종 사용자에 한정되어 있다.
백엔드 API 개발자로 경력을 시작한 사람으로서 내가 더 깊이 고민하게 된 것은 개발자 경험(Developer Experience)이다. '사내용'이라는 이유만으로 레퍼런스도 없는 API, 개발자 스스로도 읽어보지 않은 듯한 문서, 원칙 없는 엔드포인트 설계를 마주할 때마다 나는 의문을 품었다. 소프트웨어를 모듈로 나누고, MSA를 도입하고, 이에 맞춰 조직을 구성하면서도 정작 이들이 소통할 프로토콜을 정리하는 일에는 왜 이토록 소홀한가? 심지어 API나 SDK를 B2B로 제공하는 회사들의 제품에서 '만들면 누군가 쓸 거야'라는 안일한 마음가짐이 느껴질 때면 더욱 안타까워진다.
그러나 개발자들도 마땅히 좋은 선물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개발자들에게 선물을 주는 일에 더 많은 가치를 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 선물은 결국 우리 개발자들이 서로에게 주고받아야 할 것이다.
그동안 나는 이러한 생각들을 실천할 수 있는 직무를 찾아 여러 시도를 해왔고, 11월부터 Developer Advocate로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기술이 선물이 될 때, 우리는 단순한 기능 구현을 넘어 사용자와 개발자 모두의 경험을 더 깊이 고민하게 된다. 이는 결국 더 나은 개발 문화, 더 나은 제품으로 이어질 것이다. '선물로서의 기술'이라는 관점이 가져올 변화를 이제 본격적으로 탐구하고 실천하고자 한다.
다음 글의 주제: 기술의 선물을 전하는 사람 - Developer Advocate 직무를 시작하며